늦은 밤, 서재에 희미한 등불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현자님은 여느 때처럼 고서를 펼쳐놓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작은 글씨를 따라가고 계셨습니다. 겉보기에는 흔히 말하는 노안의 증세랑 비슷했습니다. 노안이 오면 글자를 오래 보고 있으면 눈이 시리고,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보면 물이 고이는 듯 흐릿해진다는 점을 베르타는 알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기억이 났거든요. 평소 같으면 조용히 물러나 휴식을 권했겠지만, 이번에는 뭔가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성 바깥의 시장에 들러 신선한 당근과 사과를 조금씩 사 왔지요. 어릴 적 어머니가 눈 건강에 좋다고 자주 해주셨던 당근 사과즙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착즙기였습니다. 베르타가 조수가 되기 전 조나우문명의 부품으로 하나 제작했다가 부품이 더 낡게 되어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기억이 있었지만, 베르타는 굳이 남의 관심을 끌거나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창고에서 일하는 이들이 설사 살아있는 것이 아닌 골렘이여도 말입니다. 곧이어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나무 공구함과 나무망치, 대패를 챙겨 조용히 성 내의 작업실로 향했습니다. 병영에서 쓰던 잡동사니와 버려진 기계 부품을 모아, 착즙기와 비슷한 구조물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번만큼은 설계도를 혼자 그렸을까요. 처음엔 조용히 하려 했으나, 나무판을 다듬고 쇠붙이의 기름때를 닦아내다 보니 은근한 망치질 소리가 새어나갔습니다. 마침 서재에서 잠시 나왔던 현자님이 소리에 이끌려 그곳을 방문합니다.
“뭐 하고 계시나요.”
“망치질이 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망치와 톱을 쓰다가 익숙하지만 근엄한 목소리를 들은 베르타는 현자님이 오셨다는 사실에 당황했습니다. 현자님은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베르타가 쌓아놓은 나무 조각과 옆에 놓인 당근과 사과를 바라보십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작품은 신식 여물통인가요. 저 당근이랑 사과는.... 혹시 말 여물로 줄 겁니까?”
“아닙니다, 미넬 님! 그건 아닙니다. 요즘 눈을 자주 부비시고 책을 가까이 보시길래, 눈이 침침하신가 해서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눈에 좋다는 음료수를 만드려고 했습니다."
"..."
"그.... 전에 있던 착즙기는 너무 낡지 않았습니까."
"..."
놀란 베르타는 다급하게 해명을 합니다.현자님은 가만히 들으시더니, 그제서야 답변을 하십니다.
“창고에 있던 착즙기 말하는 겁니까.”
"예."
"그거.. 내가 조립한 거니 잘 압니다. 먼지만 잘 닦으면 될 거예요. 조나니움은 잘 녹슬지 않으니까요."
"...."
"그리고. 내 눈은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잠시 후 골렘이 조심스럽게 오래되었지만 튼튼한 착즙기를 가지고 왔고, 현자님은 주술을 불어넣어 부품을 자동화 시켰습니다. 곧 베르타가 사온 사과와 당근은 주스가 되어 잔에 담겼습니다. 맑은 색입니다.
“과일이랑 채소를 신선한 것으로 사왔군요. 맛이 좋습니다."
“다행입니다, 미넬 님.”
베르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날 밤, 별일 없이 조용했던 하루의 끝이, 두 사람에게는 작지만 깊은 위로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