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난히 왕성 내부가 시끌벅적합니다. 현자님의 서재가 있는 복도도 다른곳과 마찬가지로 시끌시끌하자, 현자님은 서재에서 잠시 나와 주위를 둘러봅니다. 마침 복도에 놓아진 화병의 물을 갈던 골렘이 눈 앞에 띄기에, 그에게 손짓해 무슨일이 묻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미넬 님. 오늘은...."
물을 마저 갈고 현자님께 조심스레 다가온 집사 골렘은 현자님의 큼지막한 귀에 소곤소곤 무언가를 말하고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물러섭니다. 그제서야 왜 그리 시끄러웠는지 이해한 현자님은 무언가를 준비하러 갑니다. 그 뒤 자신에게 '진실'을 알려준 골렘에게 경비 근무중인 하일리아인 조수를 부르라고 전합니다. 긴급한 사안으로 논의할 것이 있다면서 말입니다.
베르타가 급하게 서재로 들어와 꾸벅 절을 합니다. 그런데 눈 앞에 있는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급스러운 주전자와 찻잔 두개입니다. 다과 몇가지도 놓여져 있었습니다. 베르타는 긴급한 사항이라 해서 실험 사고가 났거나, 고서가 오염되었거나, 서가에 흰개미가 생겨 귀중한 연구노트를 갉아먹은 것 등을 생각하고 왔는데, 갑자기 다과회라니요. 그리고 다과회 치고 너무 간소하지 않나요? 현자님은 기다리고 있었다며 인자한 표정으로 테이블보가 곱게 깔린 간이 책상 앞에 앉아 베르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의심이 가지만 현자님이 앉으라 하시니 일단 앉습니다.
“베르타, 젊은이들이 요즘 많이 마신다는 매실차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렵게 구해서 연구도 해볼 겸 하여 그대를 불렀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베르타는 의심을 거두고 표정이 펴집니다. 집사 골렘이 찻잔에 갈색 매실차를 따라 줍니다. 베르타는 별다른 의심 없이 찻잔을 들었지만, 코를 가까이 대자마자 훅 느껴지는 냄새에 얼굴 표정이 미묘해집니다. 베르타는 가족들, 특히 외가는 대대로 어업에 종사했으며, 외삼촌은 어촌마을에서 잡히는 작은 물고기들이나 갑각류를 선별해 피시소스와 병조림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덕에 베르타는 냄새만 맡고도 이것이 식물을 우려낸 차가 아니라 정어리를 발효시켜 만든 피시소스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았습니다. 일단 속는 셈 치고 한 모금 마시긴 합니다. 짜고 비릿한데다 톡 쏘는 맛이 아주 강한 피시소스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갑니다. 매실차에서는 절대 느껴지지 않고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발효 정어리 농축액의 맛이지만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짓습니다.
“미넬 님. 살구, 아니 매실차에서 피시소스 맛이 나는군요."
현자님도 역시나 태연한 얼굴로 대답합니다. 하지만 현자님만큼이나 동체시력이 좋은 베르타는 순간적으로 현자님이 멈칫하는 걸 보았겠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매실청을 만들 때 피시소스로 발효시켜서 마신다고도 하더군요. 게다가... 피시소스를 더 첨가하면 풍미가 더 좋아진다고도 합니다. 인문학 연구도 할 겸 다시 마셔봐요.”
베르타는 현자님이 매실을 피시소스 속의 효모로 발효시킨다는 아이디어에 의심을 하지 않는 실수를 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재빠르게 이게 만우절 장난인 것을 알았겠지요. 그래도 베르타는 문서상으로는 현자님이 자신의 상사였으므로 찻잔을 내려놓고 정중하게 말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요즘 유행이 그렇다면야 저같은 기성세대도 즐겨야겠군요. 미넬 님께서 새로운 풍미를 즐기시길 바라며, 저희 외숙부께서 담그신 전통 소스와 병조림 한 병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주 깊은 맛이 나니 이 발효... 매실차에 더욱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베르타는 그 때 생각을 바꾸어 오히려 현자님을 골려주기로 합니다. 현자님의 친절한 면모를 역이용하려는 속셈입니다. 그렇게 속아주는 연기를 기막히게 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일환으로 다시 찻잔을 들고 마시는 척을 합니다. 일부러 꿀꺽거리는 소리도 크게 냅니다. 현자님께서는 괜히 피시소스 원액을 마시는 '척'을 하는 베르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을까요.
“베르타."
"..."
"베르타. 미안합니다.”
"..."
"...그거 매실차 아닙니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냄새만 맡아도 압니다.”
현자님은 그제야 자신의 장난이 실패했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베르타의 고향이 어촌마을인 게 다시 생각났겠지요. 베르타는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습니다. 그러면서 내년에 다른 소재로 도전해 보는 건 어떨지 제안합니다. 그날 저녁, 미넬은 베르타가 보내온 마을 전통 피시소스 한 병과 항아리에 가득 담긴, 소금이 잘 배인 정어리 토막들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정어리 병조림을 한 조각 먹어보니 맛이 좋았습니다. 그 뒤 병을 단단히 밀봉해 골렘에게 얼음창고나 냇가 근처 같이 서늘한 곳에 두라고 일러 둡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골렘은 오늘이 서로 장난을 치고 합법 거짓말을 하는 날이라는 보고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왕족들과 귀족들, 그리고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장난은 치다가 시끄러웠던 겁니다. 현자님도 오늘이 가벼운 장난이라면 허용되는 날인 것을 확인하고 일관된 반응을 보이는 골렘 조수가 아니라 하일리아인 조수를 불러 놀려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침 미넬의 연구실에는 어디에선가 받은 갈색빛을 띠는 피시소스가 한 병 있었습니다. 얼음창고 근처 같이 시원한 곳에 두어야 더 맛있다던데, 얼음이 봄에 나나요. 아무튼, 그 유리병 속에 있는 피시소스는 잘만 속이면 매실차라고 착각하게 만들 수 있을 색이었습니다.